네이버에서 인턴을 할때 동료 한분이 마빈 민스키 교수님의 “마음의 사회” 라는 책을 추천해주셨다. 내가 철학과 논리에 빠져있다고 했더니, 이 책이 굉장히 재미있을거라 하셨다. 첫 세장을 읽자마자 내가 살면서 하고싶은 일이 이 책에 다 녹아있다는 걸 느꼈다. 몇장 채 읽지 않고 이미 내 인생 최고의 책이 되었고, 이 생각은 책장을 넘길수록 강화되었다. 내가 대학교때 왜 철학에 빠졌었는지 기억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고등학교 때 생물학으로 진로를 정하고 입시를 준비했지만, 이것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것은 이미 알고있었다. 다만 그 입시과정을 최대한 스트레스 덜받기 위해서 어느정도 내 자신에게 “아냐 이건 재밌어” 라는 식의 자기세뇌를 하며 2년을 버틴 거다. 고등학교때 가장 행복했던, 가장 자아실현을 했다고 느꼈던 순간은, 1학년 때 기묘한 수학 수업이 끝나고 칠판 앞에 서서 몇몇 친구들과 한 theorem 의 단어 하나하나를 몇시간씩 분석하고 증명하는 것이였다.
그렇다고 생물학에 관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였고, 타협점이지만 그 나름대로 즐거움도 있었다. 하나의 인간이 어떤 성분으로 구성되어있고, 각 성분은 또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렇게 macroscopic 에서 microscopic 으로 넘어가면서 무언가의 ‘본질’ 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내내 생물학을 공부할수록 화학을 알아야 하며, 그 뒤에는 물리, 그리고 근본은 수학과 철학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 사실을 알고있는 채로 프린스턴에 합격했고 난 들어가자 마자 진로를 무엇으로 바꿀지 고민했다.
현실적인 조건들을 다 내려놓고 내가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생각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있고, 이 물음을 거시적인 현상에서 가장 작은 단위까지 분석하여 이해하는 것을 좋아한다. 수업을 찾아보던 도중 PHI203 Intro to Epistemology and Metaphysics, 한국어로는 인식론과 형이상학 정도 되는 수업을 찾았다. 1학년 1학기때 들은 이 수업이 나를 뒤흔들어 놨다.
내가 살면서 배운것 중에 가장 재미있으면서 나를 가장 challenging 하는 수업이었다. 그때 이 수업에 시간을 많이 쏟았고, 프린스턴에서 처음 제출한 이 수업의 에세이에서 A를 받으면서 조교분께 극찬을 받았다. 이 수업은 신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등의 근본적 물음을 오직 논리적 추론 과정만을 통해서 증명해 내는 것이다. 모두가 agree 하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논리 한 스텝씩 연결하여, 증명되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던 물음을 답하는 것. 이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하는 철학과 살짝 다른 철학의 개념이 잡혔다. 철학은 어떤 생각이든 할수 있는 논리의 틀을 제공하는 것 뿐이라는 것을.
내가 평소에 무엇을 배우던 논리적으로 연결하려는 습관이 있는데, 이것이 하나의 학문이라는 것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이에 따라 PHI203를 기점으로 Logic, Philosophy of Mind 등 4학년 1학기까지 총 5개의 관련 수업을 들었다. 다른 수업들도 최대한 이런 인간 자체를 탐구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관련있는 것으로 정했다.
이러한 공부가 나중에 어떤 직업으로 이어질지 전혀 모르는 채로 일단 파고들었다. 하지만 2학년 2학기 즈음 공부와 직업은 별개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러한 논리적 사고가 가장 많이 요구되는 (그러면서 돈도 어느정도 버는) 직업이 뭔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1학년 2학기때 처음 배운 CS가 생각났고, 이것을 전공하면 지금 내 앞의 진로의 불확실성에서 가장 나중에 어떠한 선택을 해도 걸림돌이 되지 않을것 같았다. 결국 2학년 2학기 마지막 날 철학과 CS를 고민하다가, CS 선택 버튼을 눌렀다. (이때 사실 prerequirements, 즉 전공을 정하기 전 필수과목이 하나 모잘라서 college dean 에게 사정하며 3학년때 메꾸겠다고 약속해서 CS 선택권을 받은 것이였다.)
CS 과에서 제공하는 수업들이 나의 철학적 관심을 채워주진 못했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고등학교 때 수학시간 처럼 자아실현을 한다는 마음속의 웅장한 울림은 없었다. 꾸역꾸역 하긴 했지만 동기부여도 많이 사라지면서 3학년 2학기 까지 수업들을 정말 대충 들었다. 이때 여러 요인으로 배움에 대한 흥미 자체도 많이 떨어져있었다. 내가 살면서 느껴본 행복의 최대치가 100이라면, 이때 최대 70정도까지밖에 가지 못한것 같다.
그러다가 운좋게 삼성에서 AI 인턴십을 했고 이때 오랜만에 뭔가를 다시 배우고 싶다는걸 느꼈다. 그리고 4학년 1학기에 ML, CV 를 들으면서 그동안 들었던 CS 수업중에는 가장 열심히 들었다.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그동안 굉장히 거창하게만 들려왔지만, 조금씩 뭔지 알아갔다.
그러다가 또 운좋게 네이버에서 AI 인턴을 하고, 살면서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똑똑한 사람들과 매일 디스커션을 하면서 점점 꿈에 가까워짐을 느꼈다. 솔직히 CS 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개발 자체에 대한 흥미는 없다. 하지만 모델링을 하면서 내가 고등학교때 제일 좋아했던 수학을 더 깊이 활용할수 있고, 대학교때 제일 좋아했던 인간의 사고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걸 느꼈다.
인턴십 당시에는 바빠서 내가 하고있는 일에 대한 meta-thinking 을 자주 하지 못했지만, 인턴이 끝난 이 시점에 “마음의 사회” 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되새겨보았다. 나는 항상 인간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실제 삶에서도 많은 사람들이랑 어울릴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며, 남자친구들이랑 사귈 때 서로의 감정을 분석하는 것을 좋아했고, 더 본질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대학교에서 배운것과 같은) 탐구를 하고싶었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이러한 내 머릿속의 “생각” 뿐인 것들을 실제로 구현해내는 일이라 생각이 되었다. 항상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것을 좋아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직업이 될수 있을지 고민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그 물음을 해결해준것 같다.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는지 각 단계를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를 인공지능으로 구현하기 위해선 각 단계가 무조건 설명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걸 하나의 코드로 작성할수 있으니까.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하고, 이는 인간의 지능에 대한 그럴듯한 가설을 세우고 하나씩 실험해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때 그것을 “이해” 한다는 것은, 특정 사물-specific 디테일을 벗어나 그 사물에 대한 무언가 high level 의 idea 를 얻는 것이라 할수있다. 이는 ML 에서 X->Y 의 함수를 구현하는 것과 같다.
왜 인공지능을 신경망이라고 하는지, 그전까진 “인간의 뇌와 구조적으로 비슷해서” 정도로만 대충 이해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드디어 조금씩 왜 각 neuron 들이 “연결” 되어있고, 이것이 X 에서부터 Y 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objective function 을 왜 설정하는지가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사실 당장 AI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서 이러한 철학적인 생각들은 딱히 필요 없을수 있다. 왜냐면 서비스 자체는 좀더 일반 유저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연구는 기존 논문들을 어떤 식으로든 보완해서 새로운 걸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흥미로운 생각들을 하는 것은 매우 재미있다. 대학교때 철학과 CS 중에 전공을 고민했다고 말할때 마다 “그렇게 다른 두개를 왜?”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 모든 생각을 전해주고 싶다.
결국 철학과 인공지능 두쪽 다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전자는 그것에 대한 여러가지 흥미로운 생각들을 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러한 각 생각을 실제로 형상화 하여 구현/창조해내는 것이다.
앞으로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게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이러한 꿈이 있고, 이 꿈은 내가 AI쪽 커리어를 쌓기 오래 전부터 내 안에 있었다는 걸 간직하고 살자.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며 행복하게 살자.